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인 전투 (문단 편집) == 전개 == 조선군은 [[한양]]이 함락당하자 전라도 관찰사 [[이광(조선)|이광]]은 전라도 병마절도사 최원(崔遠),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嶸), 전라도 도사 최철견(崔鐵堅), 조방장 백광언(白光彦), 조방장 이지시(李之詩), 전주 부윤 권수(權燧), 광주 목사 권율(權慄), 나주 목사 이경록(李慶祿),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 남원 판관 노종령(盧從岭), 고부 군수 이광인(李光仁), 장성 현감 백수종(白守宗), 고산 현감 신경희(申景禧), 함열 현감 정연(鄭淵), 동복 현감 황진(黃進), 구례 현감 조사겸(趙思謙), 익산 군수 고성후(高成厚), 장흥 부사 장의현(張義賢) 등 전라도 각지의 군관을 이끌고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한다. 온양에서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尹國馨)과 충청도 병마절도사 신익(申翌), 충청도 방어사 이옥(李沃), 충청도 조방장 이세호(李世灝), 충청도 수군절도사 변양준(邊良俊)이 이끄는 충청도 군사들이 합류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도 경상도 방어사 조경(趙儆), 조방장 양사준(梁士俊), 종사관 이수광(李睟光) 등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이광은 김수를 패군한 장수라 비난하며 합류를 거절했지만 결국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이렇게 모인 삼도근왕군은 그 수가 5~8만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들 조선군이 수만 많았지, 사기는 매우 낮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순창과 옥과의 병사들이 형대원(邢大元)과 조인(趙仁)이라는 인간들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순창 군수 김예국(金禮國)은 홀로 도망쳐 이광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여기에 담양 부사 이경린(李景麟)이 이끄는 부대가 전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에게 공격받아 와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남원, 구례, 순천의 군사 8천여명도 전주에서 와해되었고 이광의 군관 옥경조(玉景祚)가 도망가는 병사들을 죽이며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또한 광주, 나주, 전주의 군사들이 용인에서 다들 도망가는 바람에 광주 목사 권율, 나주 목사 이경록, 전주 부윤 권수가 이들에게 소리치며 말렸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이광은 최원에게 전라도에 남아 반란을 진압케 한다. 최원이 남원 판관 노종령과 함께 순창에 도착했을 때에는 순창 군수 김예국이 조인을 참수하고 반란을 진압한 후였다. 이 연합군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진격했으나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이때의 조선군은 제대로 된 준비없이 급조된 부대에다가 지휘관들조차 대부분이 지휘 역량이 떨어졌다. 특히 작전 회의에서부터 문제였는데 권율이 사기를 축적하면서 조정의 명을 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내자, 다른 장수들은 [[수원]]의 독성 산성에서 진을 쳐야한다고 반박이 나오는 등 의견도 합의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권율이 신중하게 전투를 치르자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광이 이를 듣지 않고 전투를 그대로 강행한 것이다.[* 이광이 이럴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는데 출정할 때 조정으로부터 적극적 공세를 벌일 것을 압박 받고 있었다. 이광은 이미 한번 후퇴했던 것을 조정이 이걸 죽여 말아 하다가 사람을 보내 불러 낸 상황이라 한번 더 소극적으로 행동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광이 이후 전라도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을 고려하면, 이광이 무능하다기 보단 무모한 전투를 강요한 선조와 조정의 책임이 크다.] 전투 초기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본대 1000명은 한양에 있었고, 부장인 와타나베 시치에몬이 잔여병력 600명을 북두문산과 문소산에 진을 치고 지키고 있었다. 6월 4일 이광은 조방장 백광언과 이지시에게 군사 1천명을 주어 북두문산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케 한다. 백광언은 일본군 십여명을 죽이고 북두문산의 일본군 진을 불태우는 전공을 세운다. 와타나베는 문소산으로 철수하고 와키자카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6월 5일 전날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조선군은 다시 백광언을 내세워 문소산의 일본군을 공격한다. 하지만 문소산의 일본군은 조선군의 공격에 완강하게 저항했으며 결국 시간만 흐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와키자카가 이끄는 본대가 지칠대로 지친 조선군을 공격했고 백광언과 이지시, 이지례 형제, 의병 양팽[* 고경명 휘하로 이치 전투에 참가한 양대박의 아들이다.]이 전사한다. 백광언[* 무거운 철퇴와 칼을 잘 썼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비록 총 맞고 죽긴 했지만 무려 일본군 23명(일본 기록에서는 22명)을 참살하고 죽기 직전 칼과 철퇴를 던져 한 명을 더 죽이기도 했다.]과 이지시는 모두 용맹하다고 알려졌는데, 이들이 모두 전사하자 조선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만다. >백광언 등은 적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부터 사시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자 오시에 이르러 아군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 백광언, 고부 군수 이광인, 함열 현감 정연 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 >ㅡ 조경남 난중잡록 임진년 상 결국 다음날인 6월 6일 아침, 밥을 지어 먹던 조선군은 와키자카 군의 기습을 받고 패하여 일단 후퇴하게 된다. 와키자카 가문의 군기인 <와키자카기(脇坂記)>에 의하면 이때 거둔 수급이 1천여급, 생포 2백여 급이라고 적혀있다. 즉, 이건 섬멸전이었다기보다는 조선군을 밀아낸 '[[구축]]'의 의미가 더 강했던 셈. 일본 쪽에서도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을 '붕괴'시켰다거나 '섬멸'했다고 하지 않고, ''''궤주(潰走)''''시켰다고 적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이튿날 아침 군중에서 밥짓는 연기가 올라갈 때 적병이 산골짜기를 따라 돌입했다. 흰 말을 타고 쇠가면을 쓴 장수가 수십 명을 데리고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서 들어오니, 충청 병사 신익(申翌)이 앞에 있다가 그것을 바라보고 먼저 도망하자 10만의 군사가 차례로 무너져 흩어졌는데,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듯하였다. 이광·김수·국형은 30리 밖에 있었지만 역시 진을 정돈하지 못하고 모두 단기(單騎)로 남쪽을 향하여 도망하니, 적병 역시 추격하지 않았다. 병기와 갑옷, 마초와 양식을 버린 것이 산더미와 같았는데 적이 모두 태워버리고 떠났다. >---- >ㅡ 선조 수정 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1번째 기사 ) 다른 기록에선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밤이 되어 광언 등을 시켜 적의 진을 기습하여 울타리를 넘어 바로 들어가 칼을 휘두르고 마구 찍어 머리 10여 개를 베었으나 마침 짙은 안개가 꽉 차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진중에 있던 적이 모두 언덕에 올라 안개를 이용해서 총을 쏘고 뒤에서 엄습하니 광언 등이 모두 죽고 날이 새고 안개가 걷히자 적의 군사 4, 5천이 우리 진과 서로 2, 3리 거리에서 대치하여 적의 총소리가 한 번 나자 우리 대군은 마침내 무너졌다. 이광 등은 흰 옷으로 갈아입고 계속해 달아나고 8만 군사가 잠깐 동안에 모두 흩어졌다. 패전한 소식이 행재소에 들어오니 상하가 서로 쳐다보며 한숨과 탄식만 내뿜을 뿐이었다 >---- >ㅡ 기재잡기 최초 백광언, 이지시의 2천 선봉을 세운 전초전에서 안개에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앞에선 조총, 뒤에선 일본군의 엄습에 예상 밖의 패배를 겪고 장수들이 죽어나가 사기가 떨어진 틈에 다시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했고, 설상가상으로 조총에 겁먹은 장수들이 먼저 도망치자 훈련이 제대로 안 된 병사들 사이에 [[모랄빵]]이 일어나서 전장 공포 심리가 확대되어 개미 떼처럼 패주하고 만 것이다. 군사적 역량이 떨어지는 지휘관들이 역시 실전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을 지나치게 재촉하다 일어난 참사였다. 《정만록》에 의하면 당시 삼도 연합군은 다수의 [[기병]]대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